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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와 빌라도
  

제목:마리아와 빌라도
본문:눅 01:38, 막 15:15
분류:고난절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사람이름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마리아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빌라도입니다. 한 사람은 여자요 한 사람은 남자입니다. 이 대조적 구조는 구원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탄생할 때에 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육신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에 시작을 만드신 분이라면 빌라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처형한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마리아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대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모습들을 함축한 두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생명 가운데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 스스로 저버리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AD26-36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사람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는 빌라도는 예루살렘을 로마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성전세를 받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군인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까지 것입니다.(눅 13:1)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시리아 지역에 속한 유대 지역 행정관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가진 것입니다.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었지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예수님께서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먼저는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둘째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셋째 자칭 왕이라고 했다. 이것이 주님을 고발한 죄명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어 그에게 사건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하던 차에 예수를 직접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보기를 원했던 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모의를 꾸몄다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시 2:2)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하게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빌라도 자기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빌라도가 등장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매우 깊은 신학적인 교훈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역사적인 관계성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신앙고백에 대한 전부와 같습니다. 구원 역사를 마리아처럼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 자신의 세상적 이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든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자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 안으로, 해방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현실의 우리의 역사에서 일상적인 삶의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장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는 마굿간이요 하나는 궁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세상적으로 볼 때 마굿간과 같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영접하는 자가 주님의 식구요 빌라도처럼 궁전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가 예수님을 떠난 자리라면 그 자리는 구원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시대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세 아래서 한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치라는 문제가 신앙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분명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행위가 된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생각은 정치는 결코 정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위로부터 온 권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위로부터 온 권세를 가졌지만 그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했습니다.

이 지구촌에서 권세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지 않는 권력은 없어 보입니다  권력들은 그 스스로 권력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므로 민중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합니다. 권력이 민중의 환심을 위한 도구가 되면 반드시 교회를 제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로마를 항거해서 독립전쟁을 지휘하는 분도 아니었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약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의 죽음을 선고한 것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했습니다. 여기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염세적 삶을 사셨다면 이러한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성도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가 받는 시험은 이 세상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세상이 미워하거든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빛이기 때문에 어둠에 속한 삶들은 그 빛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그 어둠이 감추인 영역이 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은 문제를 피하고 또 피하여서 도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에게 고난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의신학에서 지상 교회를 전투적 교회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믿음이란 편하게 타고 가는 황금마차가 아닙니다. 현실의 교회가 기복신앙에 빠지면 그 신앙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리아와 빌라도는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 시간 속에 들어오시고 그 역사 시간에서 나가시는 인물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생에게 역사 시간 속에 들어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는 놀라운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삶에서 구원의 역사를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구원의 역사로 들어오는 문도 되고 구원의 역사를 떠나가는 문도 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딤후 4: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떠나간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보다는 자신의 야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쇄하기] 2018-03-25 07: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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